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데사 백국 (문단 편집) === 마우다드의 1차 침공 === 십자군 국가들이 안정되는 동안 셀주크 술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맘루크 마우다드에게 병력을 양성시키게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일 가지, 소크만 등의 주변 토후들에게도 소집령을 내려 유프라테스 동부의 에데사 영토를 공격할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1110년 4월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무슬림 연합군이 에데사를 공성하기 시작했다. 에데사 백작은 보두앵 왕에게 다급하게 헬프콜을 날렸지만 보두앵 왕도 베이루트를 공성중이였기에 바로 지원을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5월 경, 베이루트가 십자군의 손에 떨어지자 왕은 소수의 방위군만 놓아두고 십자군 영주들을 소집해 에데사로 향했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사촌 조슬랭과 원수인 탕크레드, 그를 지지하는 아르메니아 영주들의 병력이 모두 예루살렘 왕국의 기치 아래 모이자, 그 군세는 상단한 크기였다. 놀란 마우다드는 에데사 공성을 포기하고 하란으로 후퇴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승리를 거둔 후에, 탕크레드와 보두앵은 이슬람교도들의 응징 원정이 서로의 탓이라고 우기며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 속에서 탕크레드는 에데사는 원래 [[동로마 제국]] 시절 안티오키아의 속령이었다는 주장을 다시 끌고 나와 사정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주장을 묵살하고 에데사의 손을 들어줬다. 전투는 계속 승세로 나아가고, 십자군이 오히려 무슬림 촌락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예루살렘 왕은 더 이상 소집령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에데사의 방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 동편에 있는 모든 기독교도 인구를 에데사 백국의 방위 범위 안인 유프라테스 서편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기독교도 난민들이 유프라테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안 마우다드는 그 틈을 노린 반격을 지시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천명의 기독교도들이 죽어나갔다. 먼저 강을 건너 이 사태를 지켜보던 에데사 백작 보두앵은 자기 휘하의 한줌도 안되는 병력을 데리고 마우다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난민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기세 좋게 돌격해 적을 베어나가던 에데사의 기사들이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보두앵을 구해 낸 건 결국 원수인 탕크레드와 안티오키아의 군대였다. 에데사는 동부 유프라테스를 잃었지만, 백국에 모인 난민들에게서 징집한 병사들고 세금으로 어느 정도 상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토를 잃은 조슬랭은 투르베셀로 가서 영주를 자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